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여행기
김만수
2017년 8월 12일 새벽 3시, 이른 시각이었지만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들떠있었던지 눈이 떠졌다. 아니, 벌써 두 세 번은 눈이 떠져 머리맡의 시계를 확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좀 다른 때와는 달랐다. 그래서 잠을 설친 것 같다. 백두산을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늘 가슴 한곳에 간직하고 살았었다. 3월경으로 기억된다. 드디어 식구가 백두산 여행을 예약했다고 했다. 아이들처럼 언제 가는지 물어 바로 휴대폰 플레너에 입력했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5월 22일 아이들과 체육을 하다가 허리를 그만... 처음엔 인대나 좀 늘어나거나 담이 든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근처 한의원에 1주일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형외과를 가 엑스레이 결과 디스크라고 진단이 나왔다. 담당 의사는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지켜 보자고 했다. 그래서 진짜 가볍게 생각하고 병원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평소처럼 술도 열심히 마시고, 주말엔 망경산, 광덕산 등산도 하고, 무리하지 않는 정도에서 아이들과 운동도 했다. 하고 난 다음에는 좀 불편한 정도였고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 같았다. 퇴근하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병원에가 물리치료 받고 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증세는 호전되지 않고 악화되어 오른쪽 정강이 옆과 발목 통증이 심해져 이젠 일상생활도 어려워졌다. 처음으로 직장에 병가를 4일씩이나 내고 치료에 집중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입원해서 치료받고 싶었다. 병원을 옮겨 신경치료와 침, 주사,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았지만 심해지기 전 수준이었다. 걷는데도 불편하고 운전은 물론, 아이들 체육전담 수업도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드디어 여행 날짜는 시나브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기대했던 백두산 여행을 맘속으론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열나게 병원에 다니며 침-주사-물리치료, 약물치료로 이어지는 날들이 시계추처럼 반복되었다. 벌써 근육은 빠지고 지난 겨울 찌웠던 몸무게는 원위치 되어 팽개쳐 놓았던 혁대를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마눌님은 볼 때 마다 운동해라는 성화에 서로 큰소리가 오가는 상황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약금 손해에 남들 부부동반해서 가는데 어떻게 하냐고... 마누라 성화에 아직은 불편하고 어렵겠지만 드디어 백두산을 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러 새벽 3시 30분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세계적인 인천공항의 명성에 어울리게 쾌적한 환경은 여전했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다.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집사람이 알고 지내는 진료소 소장님이 주선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인천공항에 내려보니 아는 분들도 몇 분이 계셨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선양공항에 도착하였다. 시차는 1시간, 1시간을 덤으로 얻은 것 같았다. 첫날 일정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너무 여유로운 공항직원의 일처리로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였다.
현지 가이드와 접선으로 옛 만주 땅!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 '영광과 한'이 서려있는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기상을 떨치고 중국의 동쪽을 책임져 그 시대 동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게 했던 위대한 조선족의 거점을 향해 승합차에 맡겨 이동을 시작하였다. 입록강 이북의 땅은 머릿속으로만 그려진 그런 땅이 아니었다. 드넓은 벌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질 줄 알았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눈앞에 펼쳐지는 건 끝없는 구릉지에 심어놓은 옥수수 밭이었다. 통화시에서 한국식 점심을 먹고 고구려 수도 국내성, 집안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림으로만 보았던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비. 지금은 중국영토에 있고, 고구려가 자기네 변방에 있었던 중국의 역사라며 유네스코에 등재해버린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구경(?)하러 가고 있다. 몇 시간째 달리고 있었지만 아직도 말달리던 벌판은 나타나지 않고, 옥수수 밭만 끊임없이 나타났다. 높진 않지만 산 능선 하늘 가까운 곳 까지 심어진 것을 보니 이곳 농민들의 삶의 고달픔이 느껴졌다. 우리 70년대 새마을 사업을 떠올리게 하는 일체형 옛 군대 막사와 같은 빨간 농촌 주택이 주변 녹색 풍경과 엇박자, 삑소리 나는 연주 같아 어울리지 않았다. 드디어 고구려 제 2의 수도 국내성에 도착하였다. 고구려가 망하고 여전히 그곳에는 수 천 년 동안 조선, 거란, 여진, 말갈 등이 동북아시아의 주인으로 살고 있었다. 조선족도, 말갈족도, 여진족도 그 곳이 영원한 주인이 아닌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족의 역사로 왜곡하여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우리 역사학계의 이병도 제자들이 아직도 역사학계에 힘을 쓰고 있는 현실이니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 알면 기가 찰 노릇일 것이다. 장수왕릉이 10여리 남지 않았는지 시골 길을 280도 회전하여 가는 길에 초라한 이정표가중국말과 한글로 안내하고 있었다. 차 두 대가 서로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의 도로가 초라한 시골 집들을 옆으로 끼고 있었다. 아마 천 오백년 전에도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수백 톤이 나가는 무덤 돌을 나르기 위해 수천 명의 인부가 있었을 것이고, 도로는 지금의 4차선 도로는 있어야 됐을 것이다. 그런 도로를 어렵게 지나 장수왕릉에 도착하였다. 어느 관광지에 가나 주차장 한쪽엔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고 있는 관경을 볼 수 있다. 천원, 천원, 하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은 5년 전이나 변함이 없었다. 주차장 너머 그림으로만 보았던 장수왕이 "너희들이 멀리서 왔구나." 하고 반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위대한 왕의 능은 이민족 후손이 지키고 있어 우리 집을 남이 지키는 꼴처럼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능을 한바퀴 돌며 1500년이 지나도록 이곳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 숙연함마저 들었다. 다시 근처에 있는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왕릉과 비에 도착하였다. 그 늠름하고 웅장했던 왕의 업적처럼 비석도 여전히 그곳에 서서 그날의 역사를 가르쳐 주고 있었지만, 왠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비석보호라는 사명감을 안고 통유리 건물에 가둬져 좀 우스꽝스러웠다. 비석을 겉핥기로 보고 사진 몇 방 찍고 태왕릉을 향했다. 그래도 주변에는 관광지라고 꽃밭을 가꿔 놓은 게 그나마 조금은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왕릉은 멀리서 봐도 신라의 왕릉 규모의 거대한 돌산처럼 보였다. 왕릉에서 흘러내린 돌무더기 사이에는 아름다운 노랑범부채꽃이 나를 반기는 듯하였다. 무너져 내린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방치한 채 왕릉 문 앞에는 초라한 제복을 입은 중국 공안이 지키며 사진촬영을 막고 있었다. 약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다리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제일 뒤에서 일행을 졸졸 따라다녔다. 앞서가던 마누라는 걱정되는지 어느 새 옆에 붙어 있었다. 우리 고구려 역사 문화유적지를 단순 관광지화 하는 것 같아 씁쓸함을 뒤로 한 채 옛 국내성과 마주하고 있는 압록강을 향해 이동하였다. 옛 국내성이 있던 곳은 다 파헤쳐 지고 신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장엄했던 성의 흔적은 난쟁이 키만큼 낮은 담장은 쬐끔이라도 복원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예전 서울 한복판에 한양 성들이 현대문명에 가려져버린 것 처럼, 웅장했던 국내성의 모습은 주변 건물에 가려져 있었다. 조금 이동해 압록강 변에 도착하였다. 중상류 정도 되는지 강폭은 그리넓지 않았고 물살도 세지 않았다. 수영 조금만 할 수 있어도 강 양쪽을 건너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북 분단이 되어 생각마저 달라지기 전에는... 아니, 일본놈들이 35년간 핍박한 것도 모자라 없던 국경선을 즈그들 맘대로 그어 놓기 전에는. 아마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구례사람과 하동사람이 어우러저 살았던 것 처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래동네 사람들은 사이좋게 지냈을 것이다. 정월 대보름쯤에는 쥐불놀이도 하고 달집도 태우고독싸움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눈에 국경선은 보이지 않지만 북한쪽 드넓은 비옥한 충적토 땅에는 키 큰 옥수수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고 산자락아래는 동네인지 북한군 초소인지 건물들이 보였다. 나무 들이 있어야 할 산 정상 부근까지 옥수수가 심어져 있는 걸 보면 북한주민들의 삶이 곤궁하긴 곤궁 한가 보다. 다들 관광보트를 타는 동안 우린 압록강 표지석 앞에서 사진도 찍고, 노점에서 우리 어릴 적 쇠붙이나 헌 고무신과 바꿔 먹었던 아이스캐이크를 사서 빨았지만 심심했다. 길가에 가로수로 심어진 회화나무는 무더기로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화화나무가 무더기로 모여 함께 피어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마치 봄날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 꽃을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백두산 여행 첫날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에 들어왔다. 엉치와 발목 통증이 조금 있었지만 참을 만하였다. 중국 여행 온지 5년 정도 된 것 같지만 먹는 거나 숙소사정, 화장실, 도로사정 등이 몰라보게 나아졌다. 내일 북쪽 백두산 천지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북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 이른 점심을 먹고 두산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많은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자안내판에는 벌써 2만여 명이 넘게 입장했다고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할 것 같았지만 비룡폭포와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인지 누구하나 짜증내지 않았다.
드디어 승합차에 올랐다. 끊임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 사이 도로는 백두산천지를 향해,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인간들의 욕심의 높이까지 콘크리트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는 자작나무 키가 작아지고 수많은 들꽃들이 우릴 맞이하고 있었다. 그 풀꽃들은 남쪽에서 흔하게 볼 수 없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흰 당귀, 자주색 산당귀, 노란 금방망이, 흰색 톱풀꽃... 서서히 하늘이 맞닿아 있는 곳에 하얀 폭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늘한 기운이 살갗을 파고들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장엄한 흰색 폭포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마치 흰색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향해 기도하러 가는 순례자들 같았다. 드디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 하늘연못에서 내려주는 폭포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이제 장백폭포의 절정을 맛을 경험했으니, 또 다른 희열을 맞이하기 위해 올라온 길을 되돌아 간다. 하지만 올라온 길 보다 처음 시작한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렵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왜냐면 허리디스크 때문에.
이제 하늘 끝 북 백두산 아니, 땅끝 천지를 항해 브레이크 없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는 운전자가 없지만, 북백두산을 향하는 차는 마치 인공지능 로봇이 운전하는 차와 같았다. 하늘 끝에 도착하는 동안롤러코스터 기어변속과 브레이크는 없었다. 나도 20년 넘게 운전하고 있지만 백두산 운전원들의 운전 기술은 가히 신의 기술이었다. 점점 하늘이 가까워질수록 뒤돌아 보이는 경치는 경이로움을 넘어 어지러웠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롤러코스터는 멈춰 섰다. 이제 하늘이 열리고 구름인지 안개인지 혼돈스럽게 엉켜있고, 그 주위는 엄-청-난 성벽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서서히 안개가 걷히더니 퍼런 물을 희미하게 보여주었다. 순간 차가운 안개가 눈앞에 나타나더니 시퍼런 물을 그 깊은 곳에 숨겨 버렸다. 하늘연못이 아슬아슬한 감동을 반복하는 동안 내 눈은 어지러웠다. 일행 중 누구 네가 삼대 덕을 쌓지 못한 집이 있었는지 천지는 제 몸을 화끈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연애하는 젊은 연인들이 밀당을 하듯... 이렇게 둘째 날 일정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 맛본 감동을 내일 서백두산에서도 기대해 본다.
이제 백두산 여행의 정점 사흘째 날이 밝았다. 아침식사는 호텔식 빵중심의 뷔폐 서양식이었지만 이제 내게도 그런 식단이 익숙해지는 것은 물론 즐기고 있었다. 얼큰한 김칫국이나 된장국에 길들여졌던 내 입도 어느 곳에나 적응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서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어제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 여기 있지~. 나 찾아봐라~ " 숨바꼭질 처럼 순간 순간 하늘 연못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아 완벽한 천지 나신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천지는 하루에도 열 두 번도 더 모습이 바뀐다고 하지 안했던가? 서백두산 주차장은 어제 북파보다 훨씬 한가했다. 그래서 줄을 선지 얼마 되지 않아 차에서 내렸다. 백옥 같은 피부에 팔등신 자작 미인들이 양쪽에 도열해 맞아 주었다. 아찔한 기분에 아픈 다리에 신경 쓸 틈도 없이 앞사람들을 따라 갈 수 있었다. 천지를 가기 전 먼저 금강대협곡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중국이지만 우리 땅처럼 착각하게 하는) 무슨 협곡이? 의심스러웠다. 영덕의 불영계곡 정도면 다행이라 생각되었지만 금방 의심했던 게 미안하게 만들었다. 천지에서자기 역할을 마친 용암은 얼마나 뜨거웠나? 흘러 내리며 모든 것들을 깊숙이 깊숙이 녹여버렸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실력 있는 조각가를 고용해 용암이 1차로 만든 작품위에 쪼고 또 쪼아 수 천년간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도 미완의 작품이다. 우린 수백 년 동안 그 작품을 지키고 있는 전나무사이로 훔쳐보고 있다. 그 모습을 말로 표현하기엔 우리 말이 초라한 느낌이다. 황홀, 신선, 향연, 파노라마, 도원경, 샹그리아, 유토피아... 어떤 단어로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신선이 된 우린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번 여행의 정점 서백두산 천지를 항하는 하늘열차에 올랐다. 어제 탄 롤러코스터 보다는 느리고 스릴이 덜했지만 하늘로 향하는 시간에 주변을 볼 수 있는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열차가 한바퀴 돌아 하늘이 가까워질 때 마다 주변의 식생은 확연히 달라졌다. 미끈한 자작나무(사스레나무일지?) - 키작은 자작나무 - 이제 나무는 사라지고 고원의 대평원에는 수많은 풀꽃들이 화원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 열차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 천지역에 내려주었다. 이제 부터는 두 다리로 1400계단을 올라야 하늘 연못을 보게 허락한다. 허리 디스크로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이 높이가 매우 낮은 나무 계단이었다. 일반계단의 1/2정도.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었고, 왼쪽 사다리로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어떤 엔돌핀이 마구 쏟아진 게 분명해 보였다. 다리 통증이없다면 우리 육상부원과 함께 가끔 했었던 계단 뛰어오르기로 오른다면 단숨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 마지막 500m 정도를 생태 계단으로 만든 것은 백두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사다리 양쪽에 전개되는 작은 꽃들의 향연은 정상에 오를 때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봄에 봤던 매발톱 꽃, 용담, 눈개승마... 크기가 축소된 꽂들이 시간의 흐름을 되돌려 놓고 있었다. 희게 보였던 정상부근의 능선은 흰 화산재가 쌓이고 쌓여 굳어 식물조차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얗게 보였고 백두산이라고 했다고 한다.드디어 하늘 연못에 도착하였다. 벌써 하늘 연못을 볼 수 있는 공간은 앞에 온 사람들의 차지였다. 여기서는 눈치 것 잽싸게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우리도 이리저리 움직여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하늘 연못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의 나신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왠지 어제 북파에서 아스라이 보여 주었던 것 보다 황홀감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아! 막걸리! 늘 산 정상에 오르면 시원한 막걸리로 목마름을 달랬던 버릇이 생각났다.
뭔가 뒤처리 안한 느낌으로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오며 꽃들을 사진에 담느라 더뎌졌다. 계단 중간쯤 내려왔을 때 갑자기 몰려오는 구름이 수상했다. 우비는 준비했지만 마음이 급해져 불편한 다리가 어려워졌다. 우리가 마지막계단을 밟았을 때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올라간 아기와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무사히 하강하는 하늘열차를 타고 비오는 백두산을 내려왔다. 저녁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인지 가이드님의 비지니스(?)가 시작되었다. 전신마사지, 백두산 송이버섯... 우리 부부와 한 부부만 마사지에 응하지 않고 그시간을 우리는 주변 시내를 둘러봤다. 벼룩 시장과 광장에 남여가 모여 자연스럽게 운동하는 모습에 중국인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우리네 재개발지역처럼 그곳에도 빈부의 격차는 심했다. 1인당 4만원씩 갹출하여 맛본 송이버섯은(1인 2개정도) 아깝지 않았다.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송이버섯의 귀함을 알기에... 물론 마사지를 받고 온 사람들도 3만원이 아깝지 않았는지 큰소리로 무용담을 나누는 걸 보면.이제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일정은 어제 다 끝난 것 같았다. 빡빡하게 일정을 짠다면 2박 3일도 가능했을 것 같았다. 아침을 먹자마자 새벽(?)부터 쇼핑센터에 들렸다. 저렴한 패키지여행의 매력이라 여겨졌다. 우리 부부도 과소비를 한 것 같다. 이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밭을 보며 선양에 도착하였다.
북방 만주의 떠돌이 말갈 - 여진 오랑캐가 드디어 중원을 먹었다. 선조가 세웠던 금나라의 전통을 이어 400년을 이어 이제는 온 만주의 주인은 물론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이는 유목민이 갖고 있는 적응력과 친화력의 힘이라 생각된다. 그 때문에 만주 땅의 주인으로 수천 년을 살아왔던 우리 한인들은 이민족이 되었고, 요나라와 금나라를 세웠지만, 늘 미개한 오랑캐라고 업신여김 받았던 여진족. 이제 그 넓은 땅에 청나라를 세우고 건국 초기 복잡한 일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도 그 동안의 우리에게 짓밟혔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지 황제는 친히 군대를 몰고 조선 땅을 휘몰아친다. 쌍놈이라 여기던 놈들에게 그렇게 짓밟히고도 정신 못 차린 조선의 왕 인조는 오랑캐라 부르던 청태종에게 끌려나와 세 번 절하고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굴욕을 당한역사, '삼배구고두례' 말도 어려운... 하지만 화무십일홍 이라고 청나라도 조선도 일본 놈들에게 수 십년간 취욕을 당하다 해방된 날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오늘 8월 15일이었다.
이제 마지막 여정 선양 북릉이다. 청나라를 완성했던 청 2대 황제 홍타이지가 묻힌... 하지만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유린당한 후손들은 나라를 세운 황제의 무덤도 지키지 못해 무덤 중앙에는 미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우린 친일 청 관료와 일본 놈들에 의해 단군 이래 수천 년 살아온 만주 땅을 잃어버린 게 더 억울할 뿐이다. 중국이 만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우리도 방어보다는 공세적으로 만주공정을 해야 할 것이다. 만주 땅의 말갈과 여진은 늘 우리 역사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에 편입되어 보호받으며 피지배자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다음 백두산에 오를 때는 중국차를 타지 않고, 우리 땅을 내발로 밟아 며칠이 걸려도 오르고 싶다. 그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하며 3박 4일의 백두산 여행을 마쳐야겠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주선한 분과 3박 4일간의 감동을 함께한 18명과 함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또 다음에 올 때는 여행보다는 답사를 하고 싶다. 가까이에 있었지만 빼놓은 고구려 유적지와 독립투사들의 흔적도 꼭 가보고 싶다. 또 허리디스크로 여행에 동참하지 못할 수 있었지만 끊임없는 잔소리로 백두산을 볼 수 있게 한 마눌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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